마태복음7.7-12구하고 찾으라,그리고 남을 대접하라.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누가복음 11:5-13은 위의 말씀과 유사한 내용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 다음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다만 누가복음에는 위의 12절 구절이 없고, 11절에서 보는 기도의 결과로 “좋은 것”(ἀγαθὰ)을 “성령”(11:13/ Πνεῦμα Ἅγιον)으로 언급을 하고 있다. 성경의 편제와 언급한 내용에는 추상성과 구체성의 간극이 있으나, 말씀은 상호 보완적으로 말씀을 풀어가는 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을 중심으로 본 단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무수히 7절의 말씀을 암송하고 또한 강단의 설교자로부터 그 강설(講說)을 들었을 것이다. 구하고(Αἰτεῖτε), 찾고(ζητεῖτε) 두드리라(κρούετε). 그리고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는 쉬지 말고 계속하라고... 옳은 말씀이다. 성경은 특히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할 때, 이 동사형은 모두 현재시제로 사용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속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받고, 찾아내고 열릴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주고 받는 말씀은 세상적인 것과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확실하게 지킬 것임을 또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사 49:15; 시 27:10 참조).
그래서 주님은 그 실례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하고, 떡을 달라고 하는 자식,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식에게 돌을 주거나 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구하는 것을 주실 것임을 확신시킨다. 누가복음은 밤중에 친구 집으로 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려 할 때,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고 친구는 거절하지만 계속 강청(强請)을 하는 친구에게 결국은 떡을 내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간구에 대한 응답의 확신 시킨다. 따라서 11절에서는 악한 자라도 이렇게 집요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줄 것인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반드시 응답을 해 주실 것임을 분명히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함일까? 11절은 “좋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좋은 것이란 매우 포괄적인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물질이, 때로는 건강을, 때로는 관계의 회복을, 때로는 더 큰 믿음을…. 그렇기에 그 종류는 이루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함에 우리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응답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좀 더 누가복음과 연계시켜 본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도 좋겠지만, 영적인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래서 누가는 이것을 바로 성령(聖靈)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끝에 기록되어 있는 12절에 좀 더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칼빈은 12절은 앞의 구절과 관련이 없다고 했지만, 마태가 이와 같은 12절의 말씀을 여기서 기록한 것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됨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12절의 이 말씀은 자세히 드려다 보면 “하지 말라”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을 직역하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라고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단순히 남이 싫어하는 것은 너가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통상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己所不慾 勿施於人”(내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 행치 말라)정도로 해석되지만, 성경은 이것을 넘어 남들이 내게 그렇게 행하건 아니 행하건 상관없이 남에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눅 6:30-36).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랑의 정신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기에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셈이며(롬 13:8-10), 이것을 황금률(黃金律)이라 한다.
자, 그런데 이와 같은 황금률을 우리가 여기서 확인함에 있어, 앞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과 연계시키려 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마태는 여기에 이 말씀을 기록했을까? 이 말씀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에 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간구는 거의가 자신을 위한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앞서 산상수훈의 원리를 조금씩 확인해 보면서,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것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남을 구제하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동일한 원리에서 12절의 말씀과 그 앞의 말씀을 연결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나의 소욕(所欲)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에 먼저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이며, 남을 대접하는 것이 아닐까? 누가가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잘 헤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기에, 우리의 간구가 결코 우리의 소욕 충족을 위한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이하 계속/ 구모영씀)